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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QUE 1996 : 시각적 소통의 들춰내기와 감추기

강성원 (미술평론가)



 1.    떨고 있는 영혼, 그것은 그 자체 예술이다. 어떤 작가의 경우 내 앞에 자신의 작품을 내보이면서 자신의 떨고 있는 영혼을 노출시키는 경우가 있다.그를 바라보는 나는 그가 자신의 작품 속에서 함께 숨 쉬며 떨고 있슴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내가 그의 영혼을 훔쳐본 것을 그에게 눈치 채이지 않도록 조심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영혼을 훔쳐본 것을 알게 되면 그는 그의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더 이상 내가 그에게 다가갈 수 없도록 갑각류 처럼 두꺼운 의식의 껍질을 뒤집어쓸 것이 분명하므로. 이처럼 작가와 나 사이에 일종의 자아 감추기 게임이랄 만한 것이 진행되는 순간에만 그의 작품이 지닌 굳은 살 처럼 딱딱한 의식의 껍질을 뚫고 들어갈 수 있다. 물론 그 순간, 한편 조심하기도 한다.그의 영혼에 대한 나의 丹心이 결국 스스로를 속일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도록. 인간관계의 어느 한 순간에 일어나는 떨림 - 동요하는 영혼의 섬세한 움직임은 내겐 언제나 가장 현실적이고 적나라한 생에의 감각 그 자체를 의미한다.이것이 사라진 이후 모든 것은 죽은 것과 같아진다. 진부한 일상의 분류 범주만 남는다.
  영혼의 떨림, 그것은 童貞의 감각이다. 童貞의 파리한, 칼날 같은 진실에의 갈등이 그 높고 낮은 그대로의 깊이대로 생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이런 그의 생의 음영이 내게 던지는 개성의 모양에, 나는 그것을 읽기를 즐긴다.

2.    송심이는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나는 이 떨림을 눈치채고, 그의 떨림이 일으키는 의미의 파장을 파악하고자 했다. 이 순간 나의 게으른 의식은 수면 저 밑으로부터 살아나기 시작했다.그 모양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그와 나, 그의 작품이 이루는 의식의 지평선 (평론가와 작가, 작품이 이루는 사회적 구조의 역학관계) 밖으로 나왔다. 그 때 그는 힘들어 했다. 나는 이런 그의 감각의 소리, 어느 하나라도 놓지고 싶지 않다. 내가 이것을 놓질 때 그는 나를 극복하고 자신을 은폐하기 시작할 것이다. 가면과의 게임 그것은 싫다.
  그의 이번 작품은 '보이는 것'과 '안보이는 것'에 대한 기존관념에 대해 일종의 뒤집기를 시도한다. 뒤집어서 새로운 현실을 보여주리라는 관심에서가 아니라, 일정한 개념이나 현상에 대한 의혹이 의혹 그 자체로 자신에게 미적 타당성이 될 수 있을 만큼 커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은 개념미술적 전개구조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관심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그는 작품을 해 오면서 늘상 같은 성격의 관심 혹은 의혹에 의해 지배되었었다. 진짜/가짜를 굳이 제대로 가려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그를 과롭혔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다는 것이 갖는 일종의 태만함과 신경의 무딤, 그것이 견딜 수 없었다. 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지난 개인전에선 먹으로 탁본하듯 형상과 비형상 사이를 찍어내는 방법을 썼다.
  형상/비형상, 실상/허상, 찍을 수 있는 것/찍을 수 없는 것, 안/팎의 구분, 그것을 감히 마음 편히 정의 내릴 수 있는 신경, 그 무딘 신경은 때로는 일종의 폭력일 수 있다. 구별짓기는 곧 사회성을 의미한다. 사회성과 폭력은 권력의 양면이다. 송심이는 구별짓기의 애매모호함에 대해 얘기한다. 구별짓기의 결과에 대한 전복이 아니라 구별짓기가 지닌 진실가치에 의혹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의혹은 불안과 동요를 야기하면서 그리기에 대한 거부가 지속된다. 만들고 조립하고 그리되, 그리기는 최소한의 회화성을 약속하는 차원에서 끝난다. 만들고 조립하는 것의 기계적 반복 사이에 인간 제스처의 마지막 자취, 보통 인간의 상징으로, 어느 하나도 같은 것일 수 없는 꽃이 등장한다. 꽃이란 종적 개념이지만 그녀가 그린 꽃은 개체에 속한다. 의혹의 내용에 대한 기계적 분류와 구별짓기의 이중성을 노출하기 위한 시도 사이에 인간 감정의 구체적 모호함이 그 개별적 차이의 반복을 통해 개입된다.

3.   그러나 모호성에 대한 이 의식은 공격적이지 않다. 이 의식은 갈등의 종함을 꾀하고자하는 이성적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권력 주제의 산물), 구별짓기로 인하여 놓쳐버린 판단력 비판에 대한 감정적 회고의 산물이다. 이런 정서적 반응은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나타나는데, 감정의 회고의 반향에 울리는 기존의 구별짓기에 대한 의심은 여성으로서의 생활감정에 밀착되어 있어, 구별짓기로 인한 비극을 배척하기 보다는 감싸안기 형태로 마무리 된다.
  이 점은 어떤 의미에선 매우 '여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여성적'이란 여성의 감정적 관행의 한 형태라는 의미에서인데, 송심이의 작품을 여성성의 감각에 의해 포착된 현실논리의 간극들에 대한 일종의 엿보기라고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그의 작품들은 이런 엿보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엿보기를 통해 깨달은 비동일성의 논리를 타자들의 의식의 지평 위에 전환시켜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다. 즉 시각커뮤니케이션을 통한 미적 교육 장치 체계를 자신의 작품 안에 갖춰 놓는다. 중심/주변부에 대한 구별짓기의 해체가 작품의 구성을 열어 놓는 방법으로 그의 작품 안에 이뤄진다. 중심적 구성을 파괴하고 그 구성의 또 다른 중심이 만들기 나름일 수 있도록, 다양한 입장에서 바라보기가 가능한 그런 '객체'를 구조화한다.

4.   송심이는 내게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라는 <어린왕자>의 귀절들을 들려줬다. 어린 왕자는 "저 별 하나에는 내가 두고온 꽃이 있다."고 했다. 송심이가 나를 만나면서 보여주었던 그 떨림은 나의 기억의 성감대를 건드렸다.
 각자는 자기 기억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신의 기억의 성감대를 감추고 있다. 이런 기억 저편의 시간들이, 마르셀 푸르스트처럼, 하나의 사물 혹은 한 사람의 얼굴 표정, 감각들에 의해 현란하고 쓰리게 해체된, 그러나 빛나는 금빛의 생선비늘 만큼이나 신선하고 찬란하게 기억의 이편으로 떠올려질 때가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린왕자가 두고 왔다는 꽃은 내게는 이런 기억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송심이의 떨림 속에서 바로 그때 이후로 잃어버린 나의 꽃이 그의 꽃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의 근원을 성취하는 일이었다. 모든 것이 근본적이어야 했다. 그 근본에서 세계는 하나의 '童貞'이었고남성/여성은 없었다. 그것은 오랜 기간 아마도 그와 나의 여성성 형성에 방해가 되었던 것 같다.
  구별짓기에 대한 그의 의혹은 이처럼 시작되었고 떨림 속의 포옹으로 끝나고 있었다. 이 떨림은 전체를 한 순간 보여줄 수 있기도 하지만, 실은 구별짓기의 바로 그 경계선 위에 서있기 때문에 생긴다. 그는 외나무 다리 위에서 모든 것을 부둥켜 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구별짓기의 억압적 진/위는 포기되는 것이 아니라 구별짓기의 지평의 확대를 통해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

  

-개인전 도록에서   1996.4

2020. 12. 24.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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