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uth Korean Conceptual Artist






 


CRITIQUE 2010 : 같으면서도 다른 자리와 시선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


 

 

 송심이의 근작을 너무, 오랜만에 보았다. 그러나 내 기억의 갈피 속에는 그녀의 작품이 어딘가에 항상 박혀있었다. 자주 못 보아도, 작품 발표를 접하지 못해도, 그래서 순간 잊혀지는 것 같으면서도 가끔씩 떠오르면서, 모종의 확신 속에서 작품을 볼 기회를 기다리게 되는 그런 작가 들이 있다. 오늘날 모든 게 속도와 양, 홍보로 가늠되는 판에 저항하는 작가들도 있는 것이다. 자신만의 길을 자기의 보폭과 호흡으로 가는 사람들 말이다. 

   송심이의 근작은 ‘같은 자리’란 부제를 단 시리즈 작품이다. 사진작업이고 포토샵을 거친 합성사진도 있다. 자신의 삶의 주변에서 경험하고 관찰하고 다시 본 것을 보여준다. 사실 본다는 것이야말로 미술의 중심 과제일 텐데 작가는 주변에서 늘상 접하던 것들을 세심하게 다시 들여다보는 데서 파생되는 여러 차이와 다양한 관점을 제시한다. 여기서 보는 문제는 작가의 눈과 그 연장선인 카메라 렌즈를 통해 제시된다. 보았던 것의 경험적 측면을 저장하고 기록해주는 한편 지속해서 달라지는 관점에 의한 변화상을 포착하기위해서 사진매체는 불가피하게 요구된다. 따라서 송심이에게 사진이란 그 자체로서는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것은 작품의 개념을 전달하는 매체로서 기능한다.   

  근작은 강과 길, 하늘과 사람(관절인형)이 소재로 등장한다.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예술의 대상이다. 이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작가 자신의 관점을 보여주기 위해 차용되었다. 작가는 철저하게 자신의 삶의 반경에서 접한 세계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해낸다. 그것은 마치 한 여행자의 기록이나 일지와도 닮았다. 혹은 수집가의 비밀스럽고 집요하며 몽상적인 수집행위를 연상시킨다. 송심이는 거창하거나 의미심장한 것이 아닌 것들, 소소하고 얼룩 같은 것들, 기미나 낌새 같은 것들, 가볍고 반짝이고 찰나적이고 허깨비 같은 것들을 응시하고 이를 건져 올린다. 눈과 사진기가 그 역할을 했다. 그녀에게 사진은 핀셋 같다.  
  집 주변의 안양천 수면을 응시한다거나 어느 한 자리에서 회전을 하면서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바라본다거나 자신이 걸어 다닌 실제의 길과 그 길에서 보고 우연히 주은 돌, 그리고 그 길을 개념적으로 지시한 지도와 인공위성 사진 등을 조합한 작품, 나아가 실제 인간을 대신해 관절인형을 소재로 해서 다중적인 인간 존재에 대한 메시지를 보여주는 식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시점이나 입장이 아니라 복수적이고 상대적인 여러 관점을 공존시키고 있다. 동시에 그것들은 생성과 소멸 속에서 부침하는 존재들이다. 순간 존재했다 사라진다. 그것만이 확실한 진리이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셈이다.

  작가는 어느 날 자신의 집 주변에 위치한 안양천을 바라보았다. 수면을 반으로 가르며 어둡게 드리워진 다리의 그림자와 그 위를 떠다니는 온갖 부유물, 잔잔한 바람에 의해 흔들리며 흐르는 탁하고 흐린 강물 그리고 그 사이로 비치는 하늘 등을 조심스레 들여다보았다. 그 수면의 파장, 다리 그림자가 짓는 유사하면서도 미세한 차이를 자아내는 물의 표면을 고요하게 응시한 것이다. 작가는 그 장면을 반복해서 사진으로 담았다. (‘강-같은 자리에서 바라본 같은 자리’) 위에서 내려다보며 잡은 화면은 이등분되어 진하고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으로 양분된다. 얼핏 보아서는 강물을 찍은 사진인지 추상회화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점, 선, 면으로만 존재하는 사진이다. 사진의 기록성은 순간순간 시간의 소멸과 대체를 빠르게 포착하지만 동시에 덧없는 흐름을 처연하게 뒤쫓을 뿐이다. 강물은 계속해서 흐르고 한 시도 고정되어 있지 않는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수면은 방금 전에 보았던 수면이 아니다. 동일해보이고 아무 변화 없어 보이지만 수면은 지속적으로 다른 것으로 대체된다. 똑같은 강물은 있을 수 없다. 작가는 오랫동안의 응시를 통해 디테일의 변화를 발견하고 즐긴다. 늘상 간과했거나 평소에 잘 모르고 지나쳤던 장면이다. 우리가 보고 이해한다고 여겼던 사물과 대상은 사실 전적으로 오해와 편견, 무지에 의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작가의 이 사진은 우리로 하여금 보는 문제, 관점을 사고하게 한다. 주변의 하찮고 늘상 보는 것들을 세심하고 주의 깊게 봄으로써 그 안에 잠긴 놀라운 매력을 만나보라는 것이다. 그것은 발견하는 눈이다. 관점을 달리하면 세상과 사물은 그저 신비스럽고 경이롭다. 
   그와 유사한 것은 역시 안양천변의 어느 한 지점에 서서 360도 각도에서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사진으로 담았다. 건물 위쪽으로 포커스를 맞추어 상대적으로 하늘이 많이 들어오는 장면이다. 한 점에서 원형으로 선회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예기치 못한 풍경의 발견, 거칠고 습관적으로 보았을 때와는 전적으로 다른 장면을 선사하는 경이를 만난 것이다. 저 멀리 북한산과 아파트, 건물의 상단 일부분, 깃대와 깃발, 분수의 윗부분, 가로등, 운동장의 천장, 조금씩 다른 하늘색 등등이 눈에 들어온다. 시차를 두고 각도를 옮기며 찍는 순간 동일한 대상은 하나로 포착되지 못하고 미세한 분열과 차이 속에 거듭 환생된다. 그동안 우리가 보았던 것은 무엇일까? 과연 보기는 한 것일까? 300mm망원렌즈에 의해 걸려든 풍경은 한 눈으로 어느 한 시점에서 바라본 풍경과는 너무 다르다. 그렇게 조심스레, 찬찬히 방향을 달리하면서 바라보자 재미있고 낯선 풍경들이 하나씩 경이적으로 눈에 들어온 것이다. 나도 몰랐던 장면, ‘같은 자리에서 바라본 다른 자리’이다. 그것은 일시점의 독점적 자리를 해체시킨다. 분산적이고 복수적이고 다시점적이자 몸 전체가 훑어나가는 그런 감각이다. 전일적인 시점으로 포착할 수는 없는 세계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기도 하다.      

  작가는 언젠가 스페인에 여행을 갔었나 보다. 특정 지역을 갔다 와서는 그 지역에서 우연히 돌멩이 하나를 주워왔다. 당시 돌멩이가 놓여져 있던 땅, 바닥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그리고는 그 지역을 구글지도를 통해 확인하고 그 항공사진을 출력했다. 그런 다음 돌멩이를 주웠던 지점을 찾아 표시를 하고 그곳에 실제 돌멩이, 오브제를 올려놓은 것이다. (‘길-다른 자리에서 바라본 같은 자리’) 부재의 자리를 사진으로 촬영해 다시 보충해주는 일이다. 돌멩이기 파인 자리를 찾아 다시 그 돌멩이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주는, 무슨 의식과도 같은 일이다. 사실 지도란 개념적인 것이고 허상에 불과하다. 반면 작가는 실제의 땅을 밟았고 거닐었으며 그것을 사진으로 찍은 동시에 그녀가 그 자리에 있었음을 증거하듯이 돌멩이 하나를 파서 가져왔다. 그것을 지도사진위에 올려놓았다. 실상과 허상은 그렇게 만나고 그 둘은 동등한 가치, 무게를 지니게 되었다.  
  그렇게 강, 하늘, 땅을 돌아 이제 인간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작가는 자연과 달리 구체적인 인간을 다룰 수는 없었나 보다. 대신 관절인형을 매개로 해서 인간존재에 대한 그녀만의 시선, 관점을 드러낸다. 관절인형은 몇 겹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다중적인 인간 존재를 의미한다. 또한 인간 내부에 있는 또 다른 인간존재를 암시한다. 그림을 대신한 합성사진작업인데 몽상적이고 초현실적인 묘한 분위기를 적조하게 자아낸다. 인형들 사이로 구겨진 투명한 비닐이 부유한다. 돌이나 얼음과 같은 질감을 지닌 체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빛으로 은은하게 발광한다. 사람과 사람들 사이를 떠도는 마음과 무의식, 말들 혹은 저마다의 희망이나 꿈처럼 다가온다. 인물들은 본인 자신이기도 하고 타인이자 죽은 이, 마음속에 그리워하는 다양한 인간 존재로 겹쳐있다. 아니 그 모두가 하나의 몸 안에서 바글거리며 사는 것이 인간의 몸일 것이다. 여러 사람의 관점이 자기 몸 안에서 서식한다. 꽃처럼 풀처럼 자라난다. 
  이처럼 근작은 결국 송심이가 보는 강, 땅, 하늘, 사람에 대한 단상들로 자욱하다. 세계와 사물에 대한 깊은 응시를 통한 자연스러운 발화가 은밀하게 떠돈다. 더없이 고요하다. - 2010 





Seame Song  - Viewpoints that seem to be like and unlike


                                    Park Young-taik (Professor of Kyonggi University, Art Criticsm)

 I have not seen her recent works for a long time. But her works have always been somewhere in my mind. I am confident that I have known some artists who I am looking forward to taking opportunities to watch their jobs even though I have not seen them very often, and not visited theirs exhibitions, and sometimes I have forgotten. However, they have been always lingering in my mind. That is, there is a group of artists who are restrained to today’s world where everything is judged by speed, volume, and advertising. Those are people who are on their own track at their own pace. 

  Seame Song’s recent jobs are a series of works subtitled by ‘Same Viewpoint’. It consists of photographs and synthesized photos through Adobe Photoshop. She shows what she has experienced, observed and reviewed in her daily life. Actually, seeing is the top priority in Art but, she represents various distinctiveness and diverse viewpoints derived from looking at the day-to-day events in her daily routine. At this point, this gives rise to concerns about seeing through the artist’s eyes and the camera lens which enlarges her eyes. That is why a camera is needed not only to record what she had watched empirically but also to capture what has been changing by constantly moving her standing points. As a result, a photograph itself does not count for anything for Song. It just functions as a medium to transfer the concept of her works.
 
  There are a river, a road, and a human(a ball-jointed doll) in her recent artworks. They are common and eternal objects in Art. They represent her own special viewpoints toward the human and the world. She has looked thoroughly at her surroundings and discovered something amazing. It looks like the journal of a traveler. Or, it reminds me of a mysterious, persistent, and mourning collection.
 Seame Song has looked over and selected what is not magnificent or splendid, what is trivial and spotted, what is messy, and what is light, shiny, momentary, and blurry. Her eyes and camera act on behalf of her. Photographs are like a pincette (a pair of tweezers).
  She has gazed at the level of the AnYang River and looked at the scenery in front of her while turning round in an angle at a fixed place. She has combined the road she had actually passed through, the stone she had collected accidentally, the map which indicates the geographical position of the road, and a satellite picture of the road. Furthermore, she has tried to convey her idea about a multi-characterized human being by adopting a ball-jointed doll substituting a real person. But there are various types of multiple and relative viewpoints, not a certain fixed viewpoint. At the same time, these viewpoints stand for the existence that wanders in the cycle of birth and death. They suddenly appear and vanish. It is the definite truth that we cannot easily deny.

  One day, the artist has watched the AnYang River nearby her place. She has closely looked into the shadow of a bridge casting a gloom over the half of the surface the water, floating matter on the river, a cloudy and muddy stream of the river swinging by gentle wind, and sky that is reflected on the river. She calmly gazed at the level of the river where there was a slight similarity and diversity composed by the wave of the river and the shadow from the bridge. The artist has taken photos from that spot repeatedly.(River ? Same Viewpoint from Same Viewpoint) The picture that overlooks the river is divided into two parts, one is dark, and the other is bright. If you catch a quick glimpse of the picture, it is difficult to tell whether it is a photo of a river or an abstract painting. It is a picture only filled with dots, lines, and planes. A photograph features that it captures the time that had elapsed and substituted but also, simultaneously, it keeps track of the brevity of life silently. The river is still on the move and never remains still. The surface of the river I am watching now is not identical to what it used to be before. It seems to be same and have no movement, but, the level of river is replaced continuously. It cannot be silent. The artist has found out and enjoyed the delicate variation from the river through her long and careful view. It is a situation that we have always neglected or missed out very often. Everything we presume to be fully understood, in fact, is led by misunderstanding, prejudice, and ignorance, which holds up our mind. For this reason, her photos make us recall what is seeing, that is, the point of view. She lets us take a great care of our daily life which sometimes tend to be insignificant and face the miracle inside it. They are discovering eyes. If we change our points of view, the world where we live is very marvelous and amazing.
  As similar to her works, she has unfolded the landscape before her in photos while rotating herself 360 degrees with her feet sticking at a certain spot in the AnYang River. Sky is much more highlighted as she pointed her eyes above the buildings. While she has been turning around at one place, she has found out a surprising moment by chance, which she has faced a totally different phenomenon which used to be harsh and bitter in the past. She has finally looked over BukHan Mountain, apartments, the upper parts of the buildings, flag poles and flags, the upper parts of fountains, street lamps, the ceilings of play grounds, and the scattered color of sky far away. As she has taken photos in sequence and from another angle, the same object cannot be left in one position and can be kept reincarnated in a subtle disorganization and differentiation. What have we seen so far? Are we sure we have seen those clearly? The landscape held by a 300㎜ zoom lens is entirely unlike to that which is presented at one viewpoint. As she has turned around quickly and carefully, she comes to realize that the joyful and unfamiliar scenes become a great wonder one by one. It is ‘Same Viewpoint from Diverse Viewpoints’, the image I have not noticed yet. It dismantles the dominance of one point-of-view. It is like a sense that is decentralized, multiple, and multi-pointed and is diffused throughout the whole body. It is as a metaphor for the world where it cannot be described as only one viewpoint.

  The artist must have been to Spain. She has visited some place and chosen a stone by chance. She has taken a photo of the place where the stone used to lie. Then she has researched the location from the Google Map service and printed out the satellite picture. She has pinpointed where the stone was stationed, marked the location, and placed the real stone on the print-out. She seems to leave the non-existence through shooting photos and replace the empty space. It sounds like a ritual finding out where the stone used to be and returning it to the original place. In fact, a map is conceptual-based and just a mere illusion. Otherwise, as she has proven she had walked along the real ground and left it as a photo; she has selected a single stone. She has laid the stone on the map. The real image and illusion is brought together and appeared to be on the same wavelength in value and size.

  Now, she finally encounters a human being, passing by the river, the sky, and the ground. But, compared to her attitude toward Nature, she is quite tricky about a real person. She reveals her own distinct viewpoints on human beings by manipulating ball-pointed dolls. The dolls are layered, which represents the multi-characterized human being. They also suggest the diversity inside a human. It is not a painting but a compound of several pictures, which creates mourning, daydreaming, and sur-realistic atmosphere slowly. The folded transparent plastic between the dolls is floating. It is luminous with its icy-like or rocky-like texture, which feels like mysterious. It looks like mind, unconsciousness, and whispers among people or everyone else’ hope and dream. The dolls can be humans themselves and are overlapped by other persons, the dead, missing people. I think a human body is the only place where all of them could mingle. Viewpoints from everybody develop in his or her body itself. It grows like flowers and grass.

  As she has shown, her latest works are full of her notions about the river, the sky, and the ground that grasp her attentions. Her careful gaze to the world is on the point of breaking out secretly. It could not be calmer than before. - 2010 (Translated by 진리 Zean Lee)







2020. 12. 24. 12:13




CRITIQUE 2002 : 보이지 않는 거울

강성원 (미술평론가)



보이지 않거나 읽을 수 없는 어떤 상태에 관심이 가는 까닭은 무엇일까? 
송심이는 이런 상태에 늘 관심을 갖고 있었다. 지금 기억해보니 그렇다. 

그는 어떤 조건들로 인하여 보이지 않게 되거나 아무 것도 없어 보이게 된 의사표현을 문제삼는다. 동기는 의사표현의 내용이 아닌, 이를 가리고 있는 ‘상황’이다. 의사가 意思인지 義士인지 아니면 醫師인지는 상관할 바가 아니어 보인다. 
보이지 않게끔 된 상황을 들이댄다. 

의미 있게 비춰진다는 것은 미적으로 보인다는 뜻이다. 일상의 의미가 아니라 일상의 것이 아닌 못 보던 의미를 새겨볼 수 있게끔 한다면 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태를 만드는 조건과 의사표현 관계는 보통 사람을 힘들게 하고 저항하게끔 한다. 
송심이에게 이 관계는 관심거리이다. 왜 그런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드러내지 않는 건지 의식하지 않고 있는지도 분명치 않다.
전달되지 않게끔 하는 어떤 상태를 설정해 놓고 이를 기꺼워하는 사람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나. 작가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보다는 전달되지 않지만, ‘전달’하고픈 등대불만은 엿보이는 상태를 좋아하는 걸까.

나름대로는 잔혹함이다. 

무언가 명백한 사실이라는 것은 형식상 진부하고 내용상 더 이상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보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거울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그렇다. 사물의 이미지가 드러나는 거울은 사실은 사물을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걸 증명하기 위해 굳이 라캉의 이론까지 차출할 필요는 없다. 때론 거울은 지옥의 입구로 보이기도 한다. 죽고 나면 거울 저편의 세계로 안 간다고 누가 증명할 수 있는가? 

본래부터 아예 보이지 않는 거울이 작가의 우상일 것이 틀림없다. 



2   보이지 않는 거울은 재현될 수 없다. 

다시 등대불이다. 
'특별한 의미‘가 재현될 수 있다면, 우상이 될 것이다. 모든 의미는 그로부터 충만하게 살아날 수 있다. 

재현은 불가능하다. 
상징일 뿐이다. 
작가가 원하는 것은 ‘실현’이다.

나는 우상이 작동하기를 바란다. 특별한 의미란 무얼 말하는 걸까.
의미란 ‘특별하다’는 뜻이다. 보이는, 읽을 수 있는 글의 가독성은 사실 거짓말이다. 
아련할수록 의미가 특별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필요의 이론, 
쾌락의 비밀과 문화이론의 전망,

우상이 작동한다면 혹은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물신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해도 뒤집어보면 물신은 관객의 문제일 뿐이다. 
다시 조건이 문제가 된다. 
나도 조건의 감옥에 갇혀있다. 
조건은 따지고 보면 감각과 감정의 감옥일 뿐이다. 
마음만 바꾸면 될 일인가!

재현의 완성에 인생의 비밀이 있다면, 쾌락의 비밀도 그 안에 있다. 
특별한 것의 재현이 완성되어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작가도 나처럼 그 이유를 깨닫고 있지는 못하지만,

내 마음 끊는다고 저들 보이는 것들이 행복해지지는 않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다. 
그게 조건이다. 보이지 않는 거울이 있다. 

거울 저편에까지 의미의 닻을 내리면, 반영의 감옥은 사라진다. 




- 2002. 11월 27일에 있을 전시회를 위하여

2020. 12. 24. 12:12




CRITIQUE 1996 : 시각적 소통의 들춰내기와 감추기

강성원 (미술평론가)



 1.    떨고 있는 영혼, 그것은 그 자체 예술이다. 어떤 작가의 경우 내 앞에 자신의 작품을 내보이면서 자신의 떨고 있는 영혼을 노출시키는 경우가 있다.그를 바라보는 나는 그가 자신의 작품 속에서 함께 숨 쉬며 떨고 있슴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내가 그의 영혼을 훔쳐본 것을 그에게 눈치 채이지 않도록 조심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영혼을 훔쳐본 것을 알게 되면 그는 그의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더 이상 내가 그에게 다가갈 수 없도록 갑각류 처럼 두꺼운 의식의 껍질을 뒤집어쓸 것이 분명하므로. 이처럼 작가와 나 사이에 일종의 자아 감추기 게임이랄 만한 것이 진행되는 순간에만 그의 작품이 지닌 굳은 살 처럼 딱딱한 의식의 껍질을 뚫고 들어갈 수 있다. 물론 그 순간, 한편 조심하기도 한다.그의 영혼에 대한 나의 丹心이 결국 스스로를 속일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도록. 인간관계의 어느 한 순간에 일어나는 떨림 - 동요하는 영혼의 섬세한 움직임은 내겐 언제나 가장 현실적이고 적나라한 생에의 감각 그 자체를 의미한다.이것이 사라진 이후 모든 것은 죽은 것과 같아진다. 진부한 일상의 분류 범주만 남는다.
  영혼의 떨림, 그것은 童貞의 감각이다. 童貞의 파리한, 칼날 같은 진실에의 갈등이 그 높고 낮은 그대로의 깊이대로 생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이런 그의 생의 음영이 내게 던지는 개성의 모양에, 나는 그것을 읽기를 즐긴다.

2.    송심이는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나는 이 떨림을 눈치채고, 그의 떨림이 일으키는 의미의 파장을 파악하고자 했다. 이 순간 나의 게으른 의식은 수면 저 밑으로부터 살아나기 시작했다.그 모양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그와 나, 그의 작품이 이루는 의식의 지평선 (평론가와 작가, 작품이 이루는 사회적 구조의 역학관계) 밖으로 나왔다. 그 때 그는 힘들어 했다. 나는 이런 그의 감각의 소리, 어느 하나라도 놓지고 싶지 않다. 내가 이것을 놓질 때 그는 나를 극복하고 자신을 은폐하기 시작할 것이다. 가면과의 게임 그것은 싫다.
  그의 이번 작품은 '보이는 것'과 '안보이는 것'에 대한 기존관념에 대해 일종의 뒤집기를 시도한다. 뒤집어서 새로운 현실을 보여주리라는 관심에서가 아니라, 일정한 개념이나 현상에 대한 의혹이 의혹 그 자체로 자신에게 미적 타당성이 될 수 있을 만큼 커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은 개념미술적 전개구조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관심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그는 작품을 해 오면서 늘상 같은 성격의 관심 혹은 의혹에 의해 지배되었었다. 진짜/가짜를 굳이 제대로 가려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그를 과롭혔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다는 것이 갖는 일종의 태만함과 신경의 무딤, 그것이 견딜 수 없었다. 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지난 개인전에선 먹으로 탁본하듯 형상과 비형상 사이를 찍어내는 방법을 썼다.
  형상/비형상, 실상/허상, 찍을 수 있는 것/찍을 수 없는 것, 안/팎의 구분, 그것을 감히 마음 편히 정의 내릴 수 있는 신경, 그 무딘 신경은 때로는 일종의 폭력일 수 있다. 구별짓기는 곧 사회성을 의미한다. 사회성과 폭력은 권력의 양면이다. 송심이는 구별짓기의 애매모호함에 대해 얘기한다. 구별짓기의 결과에 대한 전복이 아니라 구별짓기가 지닌 진실가치에 의혹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의혹은 불안과 동요를 야기하면서 그리기에 대한 거부가 지속된다. 만들고 조립하고 그리되, 그리기는 최소한의 회화성을 약속하는 차원에서 끝난다. 만들고 조립하는 것의 기계적 반복 사이에 인간 제스처의 마지막 자취, 보통 인간의 상징으로, 어느 하나도 같은 것일 수 없는 꽃이 등장한다. 꽃이란 종적 개념이지만 그녀가 그린 꽃은 개체에 속한다. 의혹의 내용에 대한 기계적 분류와 구별짓기의 이중성을 노출하기 위한 시도 사이에 인간 감정의 구체적 모호함이 그 개별적 차이의 반복을 통해 개입된다.

3.   그러나 모호성에 대한 이 의식은 공격적이지 않다. 이 의식은 갈등의 종함을 꾀하고자하는 이성적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권력 주제의 산물), 구별짓기로 인하여 놓쳐버린 판단력 비판에 대한 감정적 회고의 산물이다. 이런 정서적 반응은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나타나는데, 감정의 회고의 반향에 울리는 기존의 구별짓기에 대한 의심은 여성으로서의 생활감정에 밀착되어 있어, 구별짓기로 인한 비극을 배척하기 보다는 감싸안기 형태로 마무리 된다.
  이 점은 어떤 의미에선 매우 '여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여성적'이란 여성의 감정적 관행의 한 형태라는 의미에서인데, 송심이의 작품을 여성성의 감각에 의해 포착된 현실논리의 간극들에 대한 일종의 엿보기라고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그의 작품들은 이런 엿보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엿보기를 통해 깨달은 비동일성의 논리를 타자들의 의식의 지평 위에 전환시켜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다. 즉 시각커뮤니케이션을 통한 미적 교육 장치 체계를 자신의 작품 안에 갖춰 놓는다. 중심/주변부에 대한 구별짓기의 해체가 작품의 구성을 열어 놓는 방법으로 그의 작품 안에 이뤄진다. 중심적 구성을 파괴하고 그 구성의 또 다른 중심이 만들기 나름일 수 있도록, 다양한 입장에서 바라보기가 가능한 그런 '객체'를 구조화한다.

4.   송심이는 내게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라는 <어린왕자>의 귀절들을 들려줬다. 어린 왕자는 "저 별 하나에는 내가 두고온 꽃이 있다."고 했다. 송심이가 나를 만나면서 보여주었던 그 떨림은 나의 기억의 성감대를 건드렸다.
 각자는 자기 기억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신의 기억의 성감대를 감추고 있다. 이런 기억 저편의 시간들이, 마르셀 푸르스트처럼, 하나의 사물 혹은 한 사람의 얼굴 표정, 감각들에 의해 현란하고 쓰리게 해체된, 그러나 빛나는 금빛의 생선비늘 만큼이나 신선하고 찬란하게 기억의 이편으로 떠올려질 때가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린왕자가 두고 왔다는 꽃은 내게는 이런 기억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송심이의 떨림 속에서 바로 그때 이후로 잃어버린 나의 꽃이 그의 꽃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의 근원을 성취하는 일이었다. 모든 것이 근본적이어야 했다. 그 근본에서 세계는 하나의 '童貞'이었고남성/여성은 없었다. 그것은 오랜 기간 아마도 그와 나의 여성성 형성에 방해가 되었던 것 같다.
  구별짓기에 대한 그의 의혹은 이처럼 시작되었고 떨림 속의 포옹으로 끝나고 있었다. 이 떨림은 전체를 한 순간 보여줄 수 있기도 하지만, 실은 구별짓기의 바로 그 경계선 위에 서있기 때문에 생긴다. 그는 외나무 다리 위에서 모든 것을 부둥켜 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구별짓기의 억압적 진/위는 포기되는 것이 아니라 구별짓기의 지평의 확대를 통해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

  

-개인전 도록에서   1996.4

2020. 12. 24. 12:11




CRITIQUE 1993 : 송심이 개인전의 전시서문을 쓰면서

자유를 찾아가는 새

강성원 (미술평론가)  

 나는 한 작가의 전시서문이 그 작가에게 여하한의 권력에의 의지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작가의 선택으로 나에게 주어진 잠시의 그 자유, 그 자유는 매우 소중하다. 물론 이럴 때 작가와 나 사이에 일단 맺어진 그 관계에 대해 둘 다 이성적인 게임 원칙에 따라 행동할 때 이 자유가 진정 자유일 수 있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얘기다.
 미술계의 거의 문화적 살인에 가까운 권력게임,나아가 역사 전체의 그 무수한 부조리와 수많은 이름 없는 약한 자들의 죽은 영혼을 유린하는 권력투쟁.거기서 한 마리 작은 새를 자유의 창공으로 띄워보내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송심이의 이번 작품들은 어둠 그 자체의 어둠 읽기라고 보여질만한 것을 시도한다. 그녀는 '권력에의 의지'라든가 하는 식의 '권력'이니 정치니 하는 얘기에는 별 관심도 없고 아는 바도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 작품을 해석하면서 너무 큰 잣대를 들먹거리고 있지 않나 하는 감도 스스로 없지는 않다.

 그녀에게 회화의 본질이란 거의 절대무에 이르기까지의 자기부정을 시도하면서 그 안에 최후로 남는 삶의 꿈틀거림, 그것이 있나, 없나를 아주 여리고 예민한 손짓으로 더듬어 보고자 하는 한 의식의 떨림의 표현이다.
 형식적으로 회화의 자기부정이란 방법론을 택하고 있고, 그 부정이 긍정적으로 온전히 순결하게 드러내고자하는 것이 인간들의 애쓰다 남은 삶의 결이 되고 있기에 그 순수성의 결합은 미니멀한 방법상의 절대주의에 리얼리티의 한 반영이라는 성격을 부여한다.
 자기 집 지하실 창고벽에 도공이 아무렇게나 발라놓은 페인트 칠, 그 위에 탁본 뜨듯 종이에 먹을 입혀 나갔다는 이번 작품들은 결국 도공의 페인트칠 자욱이나, 그 자욱이 떨어져 나간 형태,혹은 그 위에 물이 새어 흐른 자욱들을 또 다른 평면 위에 옮겨본 것들이다.
 어두운 지하실 벽에 물먹인 한지를 대고, 그 위에 수차례의 먹의 농담의 실험을 통해 끈질기게 지하실이라는 자연(생의 조건)이 역사로 간직하고 있을 그 기억들을 가능하면 정교하게 떠내고자 한 의지, 그것은 자유에의 의지다.
 사소하고 왜소한 존재들에도 자기만의 풍부한 삶이 있고,독자적인 가치가 있다. 그 가치는 권력적이고, 그래서 타자를 억압하는 모든 존재들의 가치와 본래적으로 동등한 실존의 가치를 지닌다.
 그녀가 이번에 하고자 한 작업은 이같이 사소한 현실, 기억, 흔적들이 지닌 존재에 리얼리티를 주는 일이다. 그 존재들을 빛 속으로 돌출시키는 방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둠 속에 묻어나는 더 깊은 어둠의 무게로 그 리얼리티를 확인하면서, 자신의 영혼의 계곡 어둠 저 편으로 룰려 나가는 그 자유에의 전망을 감지해 보는 일이다.

 그녀는 얼마 전 부터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매우 거부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손으로 그려서 무엇인가를 재현하거나 표현하여 나온 회화성에 무척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왜 답답한가. 그것은 페인팅한다는 것은 모종의 관념이나 인습에 종속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페인팅하지 않는 회화-그것은 모든 기왕의 표현의 한계를 넘는 어떤 표현을 의도하고자 선택한 방법이다. 우리의 의식, 정신, 물질의 양태가 그것을 그려낼 수 있는 한계를 넘고 있기에, 예술도 페인팅 상태를 넘어가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송심이의 작업들은 우리 화단에서 아마도 현재 가장 순수한 형태(권력의 의지가 배제된 회화 방법론의 모색)의 이런 예술의식의 탐색을 보여주는 작업으로 보인다.

 그녀의 이런 작업들이 보다 힘찬 부정의 소리를 간직해 예술을 빙자한 모든 (예술적) 권력투쟁을 그 본질대로 인식케 할 수 있다면... 작은 새의 아나키즘, 그 자유가 가장 최고의 예술권력 자체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만이라도 우리 미술계가 현실권력으로 부터의 해방구일 수 있다면... 송심이의 작품들은 나로 하여금 이런 생각들을 지울 수 없게 한다.

    

 -개인전 도록에서   1993.10

 

 

2020. 12. 23. 16:10




CRITIQUE 1992 : 미니멀리즘과 표현주의 사이

자유를 찾아가는 새



강성원 (미술평론가)  

 나는 한 작가의 전시서문이 그 작가에게 여하한의 권력에의 의지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작가의 선택으로 나에게 주어진 잠시의 그 자유, 그 자유는 매우 소중하다. 물론 이럴 때 작가와 나 사이에 일단 맺어진 그 관계에 대해 둘 다 이성적인 게임 원칙에 따라 행동할 때 이 자유가 진정 자유일 수 있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얘기다.
 미술계의 거의 문화적 살인에 가까운 권력게임,나아가 역사 전체의 그 무수한 부조리와 수많은 이름 없는 약한 자들의 죽은 영혼을 유린하는 권력투쟁.거기서 한 마리 작은 새를 자유의 창공으로 띄워보내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송심이의 이번 작품들은 어둠 그 자체의 어둠 읽기라고 보여질만한 것을 시도한다. 그녀는 '권력에의 의지'라든가 하는 식의 '권력'이니 정치니 하는 얘기에는 별 관심도 없고 아는 바도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 작품을 해석하면서 너무 큰 잣대를 들먹거리고 있지 않나 하는 감도 스스로 없지는 않다.

 그녀에게 회화의 본질이란 거의 절대무에 이르기까지의 자기부정을 시도하면서 그 안에 최후로 남는 삶의 꿈틀거림, 그것이 있나, 없나를 아주 여리고 예민한 손짓으로 더듬어 보고자 하는 한 의식의 떨림의 표현이다.
 형식적으로 회화의 자기부정이란 방법론을 택하고 있고, 그 부정이 긍정적으로 온전히 순결하게 드러내고자하는 것이 인간들의 애쓰다 남은 삶의 결이 되고 있기에 그 순수성의 결합은 미니멀한 방법상의 절대주의에 리얼리티의 한 반영이라는 성격을 부여한다.
 자기 집 지하실 창고벽에 도공이 아무렇게나 발라놓은 페인트 칠, 그 위에 탁본 뜨듯 종이에 먹을 입혀 나갔다는 이번 작품들은 결국 도공의 페인트칠 자욱이나, 그 자욱이 떨어져 나간 형태,혹은 그 위에 물이 새어 흐른 자욱들을 또 다른 평면 위에 옮겨본 것들이다.
 어두운 지하실 벽에 물먹인 한지를 대고, 그 위에 수차례의 먹의 농담의 실험을 통해 끈질기게 지하실이라는 자연(생의 조건)이 역사로 간직하고 있을 그 기억들을 가능하면 정교하게 떠내고자 한 의지, 그것은 자유에의 의지다.
 사소하고 왜소한 존재들에도 자기만의 풍부한 삶이 있고,독자적인 가치가 있다. 그 가치는 권력적이고, 그래서 타자를 억압하는 모든 존재들의 가치와 본래적으로 동등한 실존의 가치를 지닌다.
 그녀가 이번에 하고자 한 작업은 이같이 사소한 현실, 기억, 흔적들이 지닌 존재에 리얼리티를 주는 일이다. 그 존재들을 빛 속으로 돌출시키는 방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둠 속에 묻어나는 더 깊은 어둠의 무게로 그 리얼리티를 확인하면서, 자신의 영혼의 계곡 어둠 저 편으로 룰려 나가는 그 자유에의 전망을 감지해 보는 일이다.

 그녀는 얼마 전 부터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매우 거부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손으로 그려서 무엇인가를 재현하거나 표현하여 나온 회화성에 무척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왜 답답한가. 그것은 페인팅한다는 것은 모종의 관념이나 인습에 종속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페인팅하지 않는 회화-그것은 모든 기왕의 표현의 한계를 넘는 어떤 표현을 의도하고자 선택한 방법이다. 우리의 의식, 정신, 물질의 양태가 그것을 그려낼 수 있는 한계를 넘고 있기에, 예술도 페인팅 상태를 넘어가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송심이의 작업들은 우리 화단에서 아마도 현재 가장 순수한 형태(권력의 의지가 배제된 회화 방법론의 모색)의 이런 예술의식의 탐색을 보여주는 작업으로 보인다.

 그녀의 이런 작업들이 보다 힘찬 부정의 소리를 간직해 예술을 빙자한 모든 (예술적) 권력투쟁을 그 본질대로 인식케 할 수 있다면... 작은 새의 아나키즘, 그 자유가 가장 최고의 예술권력 자체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만이라도 우리 미술계가 현실권력으로 부터의 해방구일 수 있다면... 송심이의 작품들은 나로 하여금 이런 생각들을 지울 수 없게 한다.

    

 -개인전 도록에서   1993.10

 

 

 

 

2020. 12. 23.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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